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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인류세(人類世)

인간을 대신하거나, 필요에 의해 만든 과학적 산물들은 인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아이’는 고독한 인간 존재의 위기감을 과학발전의 산물인 AI를 통해서 ‘사랑’마저도 인간이 가진 본연의 감성으로 기계와 대비하여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인간만의 냉혹함에 대해 경고한다.
  • 4차 산업혁명과 인류세(人類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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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명은 천문학적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극지방의 해빙으로 도시들은 물에 잠기고 천연자원은 고갈되어 가던 미래의 지구. 모든 생활을 감시받고, 먹는 음식조차 통제되는 그 세계에서 인간들은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을 가진 인조인간들의 봉사를 받으며 살아간다. 정원가꾸기, 집안 일, 말 동무등 로봇이 인간을 위해 해줄수 있는 일은 무한하다. 단 한가지 '사랑'만 빼고...


로봇에게 '감정'을 주입시키는 것은 로봇공학 발전의 마지막 관문이자, 논란의 쟁점이기도 했다. 인간들은 로봇을 정교한 가재 도구로 여길 뿐, 그 이상의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부부가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면서 인간들은 로봇에게서 가재 도구 이상의 가치를 찾게 된다.


어느날 하비 박사는 감정이 있는 로봇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하비 박사의 계획에 따라 로봇 회사 Cybertronics Manufacturing을 통해 감정을 가진 최초의 인조인간 데이빗이 탄생하고, 데이빗은 Cybertronics사의 한 직원, 헨리 스윈튼의 집에 입양된다.


인간을 사랑하게끔 프로그래밍된 최초의 로봇 소년 데이빗. 스윈튼 부부의 친아들 마틴은 불치병에 걸려 치료약이 개발될 때까지 냉동된 상태다. 데이빗은 그들 부부의 아들 역할을 하며 인간사회에 적응해간다. 스윈튼 부부를 부모로 여기던 데이빗은 마틴이 퇴원하면서 버려지고 만다.


엄마가 들려준 피노키오 동화를 떠올리며 진짜 인간이 되어 잃어버린 엄마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이빗은 자신의 장난감이자 친구이며 보호자인 테디 베어를 데리고 여행을 떠난다. 도중에 만난 남창 로봇 지골로 조가 데이빗과 동행하고 두 사이보그는 힘겨운 여정을 거치며 수몰된 맨하탄까지 찾아가지만..." 


조금 길지만 네이버에 소개된 영화 ‘에이아이’ 줄거리를 그대로 인용했다.


‘사랑받고 싶은 로봇, 데이빗’은 엄마의 사랑을 채워주기 위해 인간이 만든 로봇이었지만 인간으로부터 버려진다. 이 로봇은 인간이 의도하고 만든데로 진정 인간을 사랑했고 그의 존재의 의미가 없어졌을 때조차도 인간의 사랑을 원했기에 인간이고자 했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그의 한결같은 마음은 인간의 사랑을 받고 싶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내 진심을 다해 사랑한 엄마로부터, 아니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로봇 데이빗은 애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제발 날 버리지 말아요, 내가 인간이 되면 날 사랑해 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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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피노키오의 동화를 믿으면서, 인간을 꿈꾸는 간절한 로봇 데이빗의 마음처럼 그가 인간이 된다면 진실한 인간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까? 로봇인 그가 바람처럼 푸른 요정을 만나서 진짜 인간이 되었다면 과연 그는 인간으로서 사랑을 받았을까? 이 영화의 끝처럼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지구가 멸망하고, 아주 먼 훗날 인류가 멸종해 버린 미래에 비로소 로봇 데이빗이 엄마의 사랑을 얻게 된다면 이 또한 인간의 이기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인지 먼 미래 지구에서 기계만이 살아남고 복원기술로 하루만 깨어난 엄마를 만나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인간 로봇 데이빗이 주는 슬프고 처연한 모습은 왠지 차고 쓰다.


 

이 영화를 만든 스필버그는 일찍이 ET라는 감정을 교감하는 외계인을 등장시켜 우주를 친근하게 지구로 끌어들이고 인간이 갖는 우주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아이의 눈을 통해 우주인 ET와 감정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우정으로 그려내면서 우주로의 동경과 과학발전의 방향을 제안했다. 그러나 인간중심의 과학발전은 환경파괴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사회질서의 변화 또한 수반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원시사회에서부터 만들어낸 자연의 법칙에 조화로웠던 사회구조는 변형되고, 심지어는 뒤틀어져 가며 과학발전은 새로운 양상의 사회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을 대신하거나, 필요에 의해 만든 과학적 산물들은 인간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에이아이’는 고독한 인간 존재의 위기감을 과학발전의 산물인 AI를 통해서 ‘사랑’마저도 인간이 가진 본연의 감성으로 기계와 대비하여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인간만의 냉혹함에 대해 경고한다. 이는 마치 성악설을 기초로 한 인간 근간의 추함과 악의 모습을 전제로 한 이 영화는 어쩌면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가 보여주고자 하는 극단적 인간중심의 이기적인 인간 모습의 단면이 아닐까.

과연 인간 사이에서 진정한 사랑은 존재하는 것인가? 남녀 사이는 말할 것 없고, 부모 자식 간에도 자신의 이기심과 잣대를 갖고 색안경을 쓴 채로 사랑이란 포장지로 진실을 왜곡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된다. 인간의 속성이 이기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애가 중심인 사랑과 달리 숭고한 헌신적 사랑에 대해 동경하고 추앙하는 것이 아니던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마음 속 사랑의 잣대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공정하지 못한 눈금이 새겨져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나이 들어감과 더불어 인정하게 하는 자아성찰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는 일임을 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의 문제가 지금 지구환경의 문제를 야기하고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연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가 싶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명명에 있어 그 자체의 인간적 오만함을 꼬집는 이가 있다 한들 인간이 이 지구에 생존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우위적 우월감과 자만으로 그들은 물론이고 인간 스스로 위기감을 초래하고 있는 지금은 인류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인간적 관점의 인류세라 명명했다 하더라도 인간이 아닌 이 지구상의 무생물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떤 생물도 그들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이 지구의 위기상황을 초래한 가해자인데 이제 와서, 지구생물의 삶의 질은 물론이고 삶의 터전 또한 위협받고 생존마저 위태로운 작금에 이르러서야 인류세의 정의와 철학을 선언함이 어쩌면 더 오만한 것은 아닐까? 생물뿐 아닌 무생물에게 까지 법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 존엄성을 지켜주자는 결의 또한 인간의 교만을 뻔뻔하게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自問)해 본다. 물론 이제라도 지구상의 모든 무생물까지도 법적 존재로 인정하고, 인간만이 아닌 모든 것들의 주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과 더불어 살아갈 지구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지구상에 이유 없이 태어난 것이 없었을, 태초의 지구의 주인이었던 모든 생물과 무생물에게 인간이 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말고 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고 교만이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무생물을 이용하고, 생물을 인간 하위의 존재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여겨 살육하고, 짓밟고, 이용한 것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먼저이다.

이런 깊은 회한이 전제된다면 지금 이 순간, 인간은 그 어떤 말과 표현보다 자연의 모든 것들에게 있어 뜨거운 연민의 눈물이 먼저여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말보다 우선한, 생명 중심의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상생과 돌봄이 곧 우리 자신이 행하여야 할 인간의 도리임을 보여주는 진심일 때 가능하다. 그것은 지구의 모든 것들과 조화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친환경적 생활실천과 생명존중과 경외심이다. 이는 곧 무생물까지도 귀히 여기는 생명사랑과 존중의 마음자리이다.


허정림, 건국대 사회환경공학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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